새미 리는 미국의 前 다이빙 선수, 코치 그리고 의사였으며
부친인 이순기 선생은 독립운동가 출신 미국 이민 1세대였습니다.
1. 새미 리의 어린시절
새미 리의 부친 이순기는 독립운동가로써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미국 이민 초기세대였습니다.
LA에 거주하던 새미 리는 12세였던 1932년에 LA올림픽을 보고 자기도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꿈을 갖게 됩니다.
그 후 새미 리는 학교에서 다이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다이빙을 시작한 이유는 새미 리는 157CM의 단신이었고 단신의 단점이 비교적 덜한 종목을 찾다가 다이빙으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기라 학교 수영장에서는 그의 출입 자체를 거부합니다.
새미 리는 끝까지 물어진 끝에 일주일에 한번씩 그것도 물을 갈기 전 수요일에만 출입하는 걸 허락 받았습니다.
수영장에 입장하지 못하는 날엔 구덩이에 모래를 채워놓고 그 가운데로 뛰어내리는 식으로 훈련을 하는 방식으로 선수로서의 경력을 이어 갔다고 합니다.
인종차별을 생생히 겪은 부친은 아들로 하여금 의사 같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직업을 가지길 원했는데
이러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던 새미 리는 1940년 서던캘리포니대(USC)에 진학하게 됩니다.
2. 새미 리의 선수시절
대학진학 후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던 새미 리는 1942년에 열린 전미 다이빙 선수권 참가하게되고
3m와 10m 두 종목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유색인종이 미국 다이빙 챔피언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하고자 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올림픽 개최가 미뤄졌고
그 기간동안 학업과 운동에 매진하여 1947년에는 USC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정도의 엘리트이기도 했습니다.
종전 후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미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면서
10m에서 금메달, 3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새미 리는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였던 것입니다.
(2분 35초부터 새미 리의연기)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대학에 복귀하여 훈련을 하고
1952년 다시 미국 챔피언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합니다.
(새미 리의 경기장면은 38초 부터)
새미 리는 당시 32세의 나이였는데 다이빙 선수로 전성기가 한참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그 결과
새미 리는 또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올림픽 2연패의 위엄을 달성하게 됩니다.
3. 새미 리의 은퇴 이후
1953년 헬싱키 올림픽 메달을 끝으로 새미 리는 현역 선수에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달 뒤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여 한국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합니다.
그의 의사 경력을 이렇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군복무를 마친 후 LA로 돌아온 새미 리는 집을 사려고 해도 백인들이 하나같이 거래를 거부해 집을 못구했다고 합니다.
새미 리는 이를 기자인 지인에게 털어놓았고 그 기자는
"위대한 올림픽 챔피언이 인종차별 때문에 집 한 채를 못사고있다!" 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됩니다.
이는 미국에서 정말 크게 논란이 되었고, 당시 미국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이 직접 나서서 새미 리를 도와주겠다고 선언까지 합니다.
집을 팔기를 거부했던 오렌지 카운티 집주인들과 부동산 업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욕을 얻어먹었고
결국 새미 리는 원하는 집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새미 리는 이후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의사와 국가대표 코치 활동을 병행하였고 1960년과 1965년엔 코치자격으로 미국 대표팀에 올림픽 금메달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여담으로 새미 리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았기에 각국 다이빙 대표팀에서 거액을 약속하며 코치 제의를 했는데
새미 리는 오직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만 코칭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특히 1964년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던 일본 대표팀은 새미 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조건으로 내걸면서 구애를 했지만
새미 리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 뒤 스스로 사비를 들여 도쿄로 가서 한국 선수들을 지도해 주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코치시절 새미 리 옹의 사진)
또한 그는 평소 차별받은 소수민족 선수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미국 내에서 차별받던 사모아계인 그렉 루가니스를 15살 부터 직접 집에 데려와 한국 음식을 요리해 주면서
아들처럼 키웠고 루가니스는 새미 리의 지도를 받은지 1년만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히게 됩니다.
그렉 루가니스는 이후 1984년, 1988년 두 번의 올릭핌에서 연속으로 3m와 10m 두 종목에 걸린 금메달을
혼자 독식하게 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1956, 1972, 1988 세번의 올림픽에는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특사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관하게 되며
선수-코치-대사의 역할로서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새미 리는 조지 포먼과 함께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
새미 리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LA한인 타운에는 새미 리의 이름을 따서 새미 리 광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몇년 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초등학교가 설립됩니다.
이후 국제 스포츠계에 두터운 인맥을 동원해 평창이 올림픽 개최에 도전할 때 마다
명예홍보대사를 자처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방한하여 다이빙 유망주들에 대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미 리는 2016년 12월 3일 폐렴으로 별세하고 맙니다.
"여러분의 꿈을 짓밟는 잘못된 관습에 굴복하지 마세요."
-1948년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모교 USC 연설-
"차별이 나를 뛰게 만들었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 인터뷰 中-
"난 결코 한민족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것은 고추장과 김치의 힘입니다"
-생전 국내 언론과 인터뷰 中-
위는 새미 리가 생전에 발언했던 명언들입니다.
새미 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의 가치관을 물려받은 영웅으로는 최고의 인물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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